<혼돈의 가장자리>
천에 자수 및 혼합매체 143x143cm 2015 |
The edge of chaos
embroidery and mixed media on fabric 143x143cm 2015 |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날 퍼포먼스를 시작하기 전부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마음은 덤덤한 듯 했지만, 알게 모르게 오늘의 이 상황을 마주하는 일이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몸 상태도, 촬영을 하는 것도, 퍼포먼스를 하는 것도 내 예상을 벗어나며 진행되었다. 촬영 중 오로지 퍼포먼스에만 임하겠다던 나의 계획(이 또한 계획이었나?) 또한 현장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를 바랐으므로 작업의 의도에 맞게 잘 흘러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실을 뜯을 때는 사실 당황스러웠다. 자수를 해체하면서 실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예상했는데, 웬 걸? 바탕과 실은 떨어질 수 없는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수를 하고 그 위에 바니시를 수없이 발라 조금의 변형도 허용되지 않게 만들었었다. 정말 ‘박제’를 시킨 것이다. 잘 뜯기지도 않는 실을 뾰족한 송곳으로 손에 힘을 줘가며 해체하는 일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순간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과 함께 지루함이 찾아왔다.
캔버스 틀을 뜯어버릴 때는 분명 어떤 쾌감이 있었다. 그 소리마저도 경쾌하게 다가왔다.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제도 혹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앞의 짜증스러운 순간을 지나 속이 다 시원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자수 사이사이에 칠해진 물감 때문인지 실을 아무리 뜯어도 이미지는 변하지 않고 있었다. 파괴하려고 해도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뿜어대는 금빛은 사람은 쉽게 변할 수 없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은색 물감을 쏟아 붓기로 결심하고 그 앞에 섰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며 약간은 망설지기도 했다. 결국 물감은 그 위에 부어졌고 금빛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검은 색에 묻혀 있어도 어렴풋이 금빛은 보이고 자수의 모양 또한 변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며 바라보았다. ‘나 지금 뭐 한 거지?’ ‘이제 어떡하지?’ ‘뭘 하면 되지?’ 내가 스스로 벌인 일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의 고민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나는 내가 구축했던 작업을 해체하였다. 하지만 하나의 제스처로 그간의 고민이 해결되리라는 어리석은 낙관은 하지 않는다. 아직은 혼돈의 가장자리 한 가운데 있기에 그(퍼포먼스) 뒤에 나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답변하는 것 또한 아직 이르다. 아마도 나는 다시 자수를 놓고 붓을 들 것이다. 하지만 ‘퍽’ 하며 뚜껑 째 튀어 나오는 물감처럼 삶의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처음 실을 뜯을 때는 사실 당황스러웠다. 자수를 해체하면서 실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예상했는데, 웬 걸? 바탕과 실은 떨어질 수 없는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수를 하고 그 위에 바니시를 수없이 발라 조금의 변형도 허용되지 않게 만들었었다. 정말 ‘박제’를 시킨 것이다. 잘 뜯기지도 않는 실을 뾰족한 송곳으로 손에 힘을 줘가며 해체하는 일은 짜증나는 일이었다. 순간순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과 함께 지루함이 찾아왔다.
캔버스 틀을 뜯어버릴 때는 분명 어떤 쾌감이 있었다. 그 소리마저도 경쾌하게 다가왔다.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던 제도 혹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로부터 벗어나는 해방감이 느껴졌다. 앞의 짜증스러운 순간을 지나 속이 다 시원해지는 듯 했다. 하지만 자수 사이사이에 칠해진 물감 때문인지 실을 아무리 뜯어도 이미지는 변하지 않고 있었다. 파괴하려고 해도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뿜어대는 금빛은 사람은 쉽게 변할 수 없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검은색 물감을 쏟아 붓기로 결심하고 그 앞에 섰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며 약간은 망설지기도 했다. 결국 물감은 그 위에 부어졌고 금빛은 곧 사라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검은 색에 묻혀 있어도 어렴풋이 금빛은 보이고 자수의 모양 또한 변하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며 바라보았다. ‘나 지금 뭐 한 거지?’ ‘이제 어떡하지?’ ‘뭘 하면 되지?’ 내가 스스로 벌인 일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현재의 고민과 두려움을 솔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나는 내가 구축했던 작업을 해체하였다. 하지만 하나의 제스처로 그간의 고민이 해결되리라는 어리석은 낙관은 하지 않는다. 아직은 혼돈의 가장자리 한 가운데 있기에 그(퍼포먼스) 뒤에 나에게 무엇이 남았는지 답변하는 것 또한 아직 이르다. 아마도 나는 다시 자수를 놓고 붓을 들 것이다. 하지만 ‘퍽’ 하며 뚜껑 째 튀어 나오는 물감처럼 삶의 예기치 못한 순간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Untitled>
싱글 채널 비디오 00:13:17 2015 |
Untitled
single channel video 00:13:17 2015 |
마치 아름답게 ‘박제’된 것 같다. 생명은 질서와 혼돈의 경계면 위 긴장감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라지만, 이건 고착화되어 조금의 미동도 없어 보인다. 살아있는 ‘척’ 하지만 그 속의 생명이 없는 박제 동물처럼 또는 영정 사진 ‘틀’ 속에 갇힌 미소를 띤 고인처럼 말이다. 사각 프레임은 안정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나는 그 지점에 서 있다. 온실 속 화초, 머물러 있자니 불편하고 밖으로 나가자니 두렵다. 신념, 작업, 독립, 결혼, 관계 등등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과도기에 놓여 있고, 나는 그것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해 행동하지는 못하고 있다.
내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지인이 지나치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수 작업을 다시 풀어 헤쳐 보는 것은 어떠냐고. 나에겐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약 9개월 동안 이 작업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맘에 들 때까지 뜯었다가 다시 바느질을 하고 또 지우고 덧칠하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완성이 되어갈 무렵, 나는 강박에 가까운 정리벽에 도취되어 있었다. 한 번의 전시를 하고 어느 날 작업실에 놓인 작업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내가 처한 상황과 작업이 일치하는 듯 했다. 그때부터 나는 작업에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였을까. 한편으론 아깝고 무모하다 싶기도 했지만, 저 작업을 풀어 헤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어느 한 순간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 결심을 한 번도 번복한 적은 없다. 어쩔 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걸 해체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해체한 이후 작업에 혹은 나에게 정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한 번의 행위로 해결될 만큼 그렇게 쉬운 문제였으면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지도 않을 터. 삶이란 불확실성의 연속일 텐데 어쩌면 나는 확실한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작업을 해체한다는 것은 하나의 해답을 찾는다기보다 혼란과 불확실한 상황 속에 던져진 나를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는 모른다. 이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도 여전히 답을 찾아 헤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넘어가지 않는다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자연계의 현상 중에는 임계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물리적인 계가 다른 상으로 변화를 할 때 변화의 경계에서 큰 요동을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 차원에서 본다면 변화를 위한 혼돈과 고통, 시련을 겪는 단계이다. 임계점을 통과하지 못한 변화는 일시적이기에 서서히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이와 같을 것이고 매 순간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혼돈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내 작업을 오랫동안 지켜봤던 지인이 지나치듯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수 작업을 다시 풀어 헤쳐 보는 것은 어떠냐고. 나에겐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약 9개월 동안 이 작업에 매달리다시피 했다. 맘에 들 때까지 뜯었다가 다시 바느질을 하고 또 지우고 덧칠하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완성이 되어갈 무렵, 나는 강박에 가까운 정리벽에 도취되어 있었다. 한 번의 전시를 하고 어느 날 작업실에 놓인 작업을 바라보고 있는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내가 처한 상황과 작업이 일치하는 듯 했다. 그때부터 나는 작업에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였을까. 한편으론 아깝고 무모하다 싶기도 했지만, 저 작업을 풀어 헤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어느 한 순간 내린 결정이었지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그 결심을 한 번도 번복한 적은 없다. 어쩔 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사명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질문이 생긴다. 그걸 해체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 해체한 이후 작업에 혹은 나에게 정말 어떤 변화가 생기는 걸까. 사실 잘 모르겠다. 한 번의 행위로 해결될 만큼 그렇게 쉬운 문제였으면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지도 않을 터. 삶이란 불확실성의 연속일 텐데 어쩌면 나는 확실한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작업을 해체한다는 것은 하나의 해답을 찾는다기보다 혼란과 불확실한 상황 속에 던져진 나를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과는 모른다. 이 행위가 이루어진 뒤에도 여전히 답을 찾아 헤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이 상황을 넘어가지 않는다면 조금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만 같다.
자연계의 현상 중에는 임계현상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물리적인 계가 다른 상으로 변화를 할 때 변화의 경계에서 큰 요동을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인간 차원에서 본다면 변화를 위한 혼돈과 고통, 시련을 겪는 단계이다. 임계점을 통과하지 못한 변화는 일시적이기에 서서히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이와 같을 것이고 매 순간의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혼돈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Snow constellation>
천에 자수 및 혼합매체 129x129cm 2014 |
Snow constellation
embroidery and mixed media on fabric 129x129cm 2014 |
삶의 일부이고 관계의 일부였던 것들은 언젠가는 상실의 일부가 되고, 그 상실은 또 다른 것으로 채워지며 그렇게 삶은 굴러간다. 그러한 삶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낙관과 비관, 우연과 필연, 질서와 무질서….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작업에서 보이는 것처럼 앞면과 뒷면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국엔 한 몸인 셈이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갈무리하듯 만들어지는 화면에서 한 면은 질서정연한, 또 다른 면은 무질서한 상반된 패턴이 앞뒤를 오가는 무수한 실들로 이어져 얽히고설킨 관계들을 만들어낸다. 그 삶의 경계 위에 오늘도 아슬아슬 꽃이 피어난다.
<Epitaph-KMJ>
천에 자수 및 혼합매체 119x87cm 2014 |
Epitaph-KMJ
embroidery and mixed media on fabric 119x87cm 2014 |
꽃은 일종의 기호 즉, 상징언어이다. 사람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 혹 사랑을 고백하거나 쾌유를 빌거나 고인에게 조의를 표할 때 꽃으로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이는 꽃에 담긴 상정성이 은유적으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꽃말’이다. 한 때, 꽃말은 중세의 기사들 사이에서 편지 대신 애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꽃말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했던 모든 시대와 장소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또한 역사적, 문화적, 지리적 맥락에 따라 그 의미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존재한다.
꽃은 예부터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꽃의 특성은 죽음의 상징성을 갖는다. 하지만 동시에 생성과 소멸을 매년 반복하는 매우 종교적인 존재로서 재생과 영원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꽃을 죽은 자에게 바치는 풍습은 인간의 오랜 종교 의식이었다. 우리나라 충북 청원의 두루봉 동굴에서 흥수아이라고 불리는 구석기 시대의 5살 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유골 주변에서 국화 꽃가루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꽃은 그 자리에서 피어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꺾어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처럼 인류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장례의 풍습으로 꽃을 사용하여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다. 생자필멸 (生者必滅) 즉,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고, 인간은 누구나 죽어서 무덤으로 들어간다. 무덤이란 말은 무(無)의 더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그 장소에 묘비명이 세워져 무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죽은 자의 목소리이다. 비명일 수도, 체념일 수도, 후회일 수도, 확신일 수도 있을 그 다양한 목소리가 침묵 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꽃은 예부터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아름다움을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꽃의 특성은 죽음의 상징성을 갖는다. 하지만 동시에 생성과 소멸을 매년 반복하는 매우 종교적인 존재로서 재생과 영원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러한 꽃을 죽은 자에게 바치는 풍습은 인간의 오랜 종교 의식이었다. 우리나라 충북 청원의 두루봉 동굴에서 흥수아이라고 불리는 구석기 시대의 5살 아이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유골 주변에서 국화 꽃가루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꽃은 그 자리에서 피어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꺾어 올려놓은 것이었다. 이처럼 인류는 아주 오랜 시절부터 장례의 풍습으로 꽃을 사용하여 고인에 대한 애도를 표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은 보편적이고 일상적이다. 생자필멸 (生者必滅) 즉, 살아있는 자는 반드시 죽게 마련이고, 인간은 누구나 죽어서 무덤으로 들어간다. 무덤이란 말은 무(無)의 더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는 그 장소에 묘비명이 세워져 무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죽은 자의 목소리이다. 비명일 수도, 체념일 수도, 후회일 수도, 확신일 수도 있을 그 다양한 목소리가 침묵 속에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Flower language> 시리즈
천에 자수 및 혼합매체 60x60cm 2014 |
Flower language series
embroidery and mixed media on fabric 60x60cm 2014 |